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문단 편집) == 생애 == 당시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이었고, 지금은 [[폴란드]] 땅인 노보기에오르기에프스크[* [[바르샤바]] 근처로 주변에는 모들린 공항이 있다.]에서 [[러시아 제국군]] [[공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뜬 뒤에는 주로 고모인 옐리콘다의 집에서 자랐고, 옐리콘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오페라단의 전속 가수가 되자 같이 따라갔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을 받으면서 일찍부터 음악에 입문했지만, 음악가가 되는 것에 자신이 없었는지 아버지처럼 [[사관학교]]에 들어가 공병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재학 중이던 189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온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한 [[표트르 차이콥스키|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차이콥스키)|교향곡 6번]]을 듣고 작곡가가 되겠다고 뜻을 굳혔다. 다만 이미 등록한 사관학교 교육도 포기하기 아까웠는지, 일단 1902년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모스크바]] 근교의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틈틈이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다. 글리에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글라주노프]]가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소개서를 써주었고, 1906년에 입학해 아나톨리 랴도프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웠다. 음악원 재학 중에는 자신보다 10년 가까이 어렸고 마찬가지로 글리에르에게 배웠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프로코피예프]]와 친교를 쌓으면서 곡도 같이 쓰고 랴도프에 대한 [[뒷담화]]도 같이 까는 등 잘 어울렸고,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았다.[* 다만 둘의 음악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는데, 프로코피예프같이 건방진 성격의 후배와 평생도록 우정을 나누었던 것을 보면 서로를 음악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했던 듯하다. 또한 먀스콥스키도 음악인생 초기에는 나름 진보적인 음악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프로코피예프와 친해질 당시 음악적인 견해 차이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로코피예프 입장에서도 먀스콥스키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이 수업 시대에는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나 차이콥스키 같은 선배들 외에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전위적인 음악을 써냈던 [[스크랴빈]]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피아노 작품에서는 스크랴빈의 특유의 화음연타가 자주 등장한다.] 1911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뒤 모교의 강사와 음악비평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의 신작을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공병 장교로 다시 징집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전투신경증으로 인해 후방인 [[탈린]]으로 옮겨 [[해군]] 요새의 축성에 참가했다. 이 기간 동안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와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시기의 혼란을 겪었는데, 아버지가 황제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붉은 군대]]에게 살해당하고 고모의 죽음과 고모부의 [[자살]]을 접하는 등 정신적으로 수많은 시련을 당했다. 이후 소련이 성립되면서 소련군으로 개편된 붉은 군대로 옮겨가 1921년에 [[전역]]했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어 모스크바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교적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축에 속하는 작법을 지향했으며 소련 작곡가들 중에서는 특히 [[교향곡]] 등 기악 음악의 작곡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시작된 [[대숙청]] 속에서도 보수적인 음악 성향 때문인지 별 화를 입지 않고 넘어갔지만,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집단농장]] 계획을 찬양하는 시를 소재로 하거나 최고 권력자에 대한 찬양을 담은 관현악곡과 노래를 작곡하며 소련 정권이 내세운 사회주의 사실주의 사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먀스콥스키는 생애 내내 성실하게 작곡을 했으며, 특히 교향곡은 27곡을 남겨 소련-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교향곡을 작곡한 인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시베리아]]로 피난해 그 지방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작곡했고, 1차대전 시기 때처럼 전쟁의 참화를 표현한 곡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8년에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소련 음악계의 [[숙청]]에 휘말렸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하차투리안]] 같은 여타 작곡가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비판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공적인 공격 외에도 암으로 인해 건강도 쇠약 일로를 걷고 있었고, 1950년에 마지막 [[현악 4중주]]를 작곡한 뒤 투병하다가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하루 전에 쇼스타코비치가 문병을 왔을 때, 먀스콥스키는 "여기 이렇게 누워 이제껏 내가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이 인민에게 반하는 것일 수도 있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씁쓸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라고 회한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